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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 속도가 문득 너무 빠르다는 생각을 했다.

ghell 2026. 10. 6. 14:13

나는 네 속도가 문득 너무 빠르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네게 고맙다는 말을 했어야 했는데. 생각해 보니 이용해서 미안하다는 말은 전했던가. 너무 오랜만에 다시 보는 겨울에 정신이 팔렸다, 조금 이따 전해야지.

도피가 본래 각오를 무릅쓰고 하는 것이라지만. 잘 따라오고 있는지 살펴보기보다도, 잡은 손의 악력은 마치 끌려가는 기분이 들기도 해서 겁을 참느라 애를 좀 썼다. 그래도 왕성 밖을 나온 것이 몇 년 만이라, 그래서 네 속도에 따라가기 버거운 것으로 생각하고는 말아버리기로 했다. 

사람이 참 간사하다. 차라리 왕성에서 죽어 고귀한 희생을 한 왕으로 남을 것을 인제 와 후회가 들었다. 이렇게 죽으면 많은 손해가 있다. 첫째로, 많은 이들이 나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지 못하니 공화정 선포와 새 시대의 개혁이 갖는 고양감이 떨어질 것이고, 둘째로 많은 이들의 원념이 해소되지 못할 것이다. 케케묵은 감정이 얼마나 괴로운지 잘 알아서, 이것만큼은 꼭 해소되길 바라던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비참하다. 속아 넘어간 스스로가 혐오스럽기 그지없다. 과거는 지났고 죽을 날을 받아둔 채로 현재만을 살아가니 돼지와 내가 다를 바 있나 생각하곤 했는데, 정말 다를 바 없겠다. 

이를 악물고 버텨가며 준비한 몇 년이 이렇게 쉽게 망쳐진 것 같다. 그때 손을 잡지 말걸, 네 앞에서 울지 말걸, 아니 말을 섞질 말아야 했다. 마주치지 말아야 했고, 괴롭히지 말걸. 애초에 서임하지 말 것을. 결국 또 처음부터 내가 잘못한 일이다.